구원, 하나님의 통치 - 로마서 강해 3
이 책에 실린 설교는 우리교회 주일예배에서 로마서 4장과 5장을 강해한 것입니다. 2012년 12월부터 2013년 11월 사이에 한 강해로서, 로마서 강해 36회부터 58회까지, 총 23회의 설교를 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3:21-3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구원과 대조됩니다. ‘믿음과 행위’는 실천(순종, 행동)의 유무에 관한 대조가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 원인과 근거가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가, 아니면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서 나오는가에 관한 대조입니다. ‘나는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라고 이해를 하는 것은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아니라 행위로 인한 구원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조건(원인, 근거)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믿는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4, 5장에서 이 논지를 끝까지 밀고 갑니다. 반론을 예상하면서, 그 반론에 대해서도 충분히 반박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의 조건이나 근거, 원인 등이 구원받을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주장이, 기독교인들의 타락을 조장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현대 한국 기독교의 여러 가지 죄악이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구원’만을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일면 타당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에 대한 수사적 선포만 있었지 그 내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설교집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인들의 일상사에서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지, 타인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설교집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조금이라도 맛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밑줄긋기]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할 때, 그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근거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그 어떤 조건이나 근거를 보지 않고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나에게서 그 어떤 조건이나 근거를 보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적용하여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방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강해 36)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무엇이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확신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하나님을 설득하고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즉 믿음은 하나님을 움직이는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해 36)
38절의 번역을 보면 ‘회개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라는 식의 뉘앙스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반대로 ‘회개를 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은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38절에서 사용된 전치사는 여러 가지 뜻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하기 위하여’로 번역할 수도 있고, ‘...하기 때문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기 위하여’로 번역을 하면,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회개를 해야 합니다’로 번역을 해야 하는 것이고, ‘...하기 때문에’로 번역을 하면,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회개를 해야 합니다’로 번역을 해야 합니다.
제 생각은 후자의 번역이 오히려 더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번역의 차이는 신앙의 방향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개와 죄의 용서 관계를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하여 회개를 해야 한다’로 이해하기 때문에, 회개를 회심, 죄에 대한 자책이나 후회 등으로 축소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회개’라는 것은 감정적인 것보다는 의지나 행동이 훨씬 더 비중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 가던 길에서 반대로 돌이키는 행동이지, 그냥 가던 길 가면서 그 가는 길을 후회하고 ‘내가 왜 이렇게 사는가’라고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회개는 지금 살던 방향에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은 그대로 가면서 자책하고 후회하고 한탄하는 것 같은 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원의 근거를 회심을 하는, 즉 죄를 후회하는 자신의 행동에 두게 된 것 같습니다. 즉, 제가 잘못했으니 용서해 달라는 고백이 구원의 근거인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지요.
(강해 37)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반응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율법의 행위와 대조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구원을 받나요? 혹시 당신은 만인구원론을 주장하는 것인가요?’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데, 제 대답은 ‘모른다’입니다. 제가 하나님도 아닌데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반응 유무에 따라서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며,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삼국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며, 치매에 걸린 노인의 하나님이기도 하며, 정신지체장애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며, 정신병에 걸린 사람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며, 똥오줌 못 가리는 유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강해 39)
그러기에 신자의 인생이 고달플지도 모릅니다. 제발 그냥 내버려두면 좋으련만, 그냥 모른척하고 넘어가주면 좋으련만, 그냥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두면 좋으련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취소하지 않는 대신에, 우리를 버리지 않은 대신에 우리에 대한 책임을 다하실 것입니다. 끝까지 다 하실 것입니다.
(강해 41)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결코 인간에게서 근거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라고 우리는 구원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원을 이해하면서, 이렇게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혹은 판단하는 식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곧 자신이 이해한다고 하는 구원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라는 것은 곧 다른 사람의 구원과 신앙에 대해 내가 판단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타자의 구원을 판단하며 자신의 구원받음을 자랑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나쁜 것입니다.
(강해 47)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라는 고백, 선언이 나타내야 하는 효과는 ‘내가 여럿 중의 최고가 아니라 여럿 중의 하나구나, 내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를 이루는 여러 가지 것 중의 하나구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제일 소중한 것이 아니라 내가 소중한 만큼 타인도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나의 가치와 타인의 가치가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온 천하보다 귀한 생명’인데, 그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생명이 수십억명이 있구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별 다를 것이 없다는 것, 이것이 확장되어 사회적 연대, 우주적 연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강해 51)
성경은 죄를 매우 광범위하고, 보편적이며, 죄를 짓는 인간을 뛰어넘는 어떤 세력의 문제로 봅니다. 그것을 성경적 표현으로는 ‘죄가 왕노릇 한다, 죄가 죽음으로 지배를 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왜 사람이 죄를 짓습니까? 왜 사람이 죄악에 동참합니까? 죄가 그를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의지라기보다는 -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마는 - 지배당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죄인도 거대한 악의 세력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죄인을 바라볼 때, 우리는 정죄와 심판과 죄를 지은 사람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연민의 마음으로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거대한 악의 세력의 희생자라는 관점에서 죄인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을 희생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연민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강해 55)
우리의 주된 관심은 사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어떤 선택이 하나님의 뜻인가?’에 두기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신다. 하나님이 나를 은혜와 생명과 사랑과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나를 통치하신다.’라는 것에 신앙의 초점을 두셔야 합니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간에, 동쪽으로 가든지 서쪽으로 가든지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든지 저 사람과 결혼하든지 간에, 이 직장을 다니든지 저 직장을 다니든지 간에, 저 친구를 만나든지 이 친구를 만나든지 간에, 직장을 다니든지 여행을 가든지 간에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다스림은 은혜와 생명을 통하여 지속된다는 것, 그것으로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저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만큼 핵심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강해 56)
이중구원론과 만유구원론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제 대답은 ‘모르겠다’입니다. 두 주장 모두 성경에 근거하고 있고, 논리도 탄탄하기 때문에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논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구원이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구원이 누구의 일인가, 구원을 누가 하시는가입니다. 자칫 이런 논쟁의 함정은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우리의 사고와 생각의 틀 안에 하나님의 구원을 가두어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중 구원론’과 ‘만유 구원론’에서 어느 한 주장을 택하여 그것을 교리화하고 절대화시켜서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실 모릅니다. 하나님이 어찌하실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해나가시는 방식 등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강해 57)
지금 제가 이 이야기를 왜 하는 줄 아십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이중구원론이 옳습니까? 만유구원론이 옳습니까? 어느 것이 더 성경적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우리의 답은 ‘그래서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의 삶은 어떠합니까? 당신이 이중구원론을 믿는다면 그 이중구원론이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어떻게 만들고 있나요? 당신이 만유구원론을 믿는다면 그 만유구원론이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어떻게 만들고 있나요?’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중 구원론이 성경적이냐, 만유 구원론이 성경적이냐’는 것은 성경의 관심이 전혀 아닙니다. 성경의 관심은 ‘지금 여기에서의 삶’입니다. 여러분이 이중구원론을 믿든지 만유구원론을 믿든지, 아니면 잘 모르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현재의 삶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지금 여기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입니다. 이것에 ‘지금 여기에서의 삶’으로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강해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