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 이상의 모형
하나이며 여럿인 이름의 책
어긋남이 만들어낸 우연한 파문
늦여름이다. 하늘하늘 땀이 흘러내리는 혹서에 너를 사랑해. 그들은 나를 대신하여 말했다.
―「나의 검은 고양이」에서
2016년 현대시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유림의 두번째 시집 『세 개 이상의 모형』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544번으로 출간되었다. 첫 시집 이후 약 반년 만에 나온 이 책은 『양방향』 이전에 씌어진 원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책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많은 시들을 빼고 고치고 덧붙이면서 처음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세 개 이상의 모형』에서 김유림은 기억을 지긋이, 유심히, 끈질기게 지켜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시간과 기억을 끝없이 떠돌며 두려워했던 지난 시집에서 좀더 나아가, ‘나’라는 내밀한 장소마저 허물어 무수한 문장과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다. 해설을 맡은 강보원의 말을 빌리면 이 책은 김유림에게 놀이 장소이자 전시 공간, 영원히 임시에 불과한 거주지, 고집스럽고 (이제는) 즐겁게 헤매려는 기록이다. 김유림의 시는 진지한 해석이 필요한 텍스트이지만, 책의 질서에 몸을 맡긴 채 둥둥 흘러가다 보면 기묘하고 귀여운 모형들을 거쳐 경쾌한 파동을 마주치게 될 거라는 기대 또한 걸어봐도 좋겠다. 당신은 우연히 이 시집을 만난다. 당신은 이 책을 헤매고 싶어질 것이다.
저의 시에서는 시간을 건너뛰거나 시간을 끌어오는 것이 중요하고, 장면이 중요하고, 사람이 중요하고, 사람들이 중요하고, 기억이 중요하지만 또 지금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한데 모아 집어삼키는 책이라는 존재가 중요합니다. 선형적인 시간의 경험을 제공한다고 여겨지는 책이라는 존재가 이것들을 데리고 갑니다.
-「뒤표지 글」에서